충혜왕 국왕. (고려)

 

충혜왕


충혜왕 / 헌효대왕 충혜왕 / 헌효대왕묘호 없음 시호 고려 헌효대왕 헌효왕 원충혜왕 성씨왕 휘고려정몽골식 부다시리왕 덕녕공주 희비왕자 왕흔 왕저부왕 충숙왕모후공원왕후릉 생몰연도 음력 1315년 1월 18일 ~ 1344년 1월 15일 양력

재위기간(복위후) 음력 1339년 3월 계미일~1343년 12월 계축일(4년) 양력



1. 개요

고려의 제28대 국왕으로 묘호는 없고 시호는 충혜헌효대왕이다. 장난정. 몽골식 이름은 보탑실리 충숙왕과 공민왕후 홍씨의 장남으로 공민왕의 형이다.

연산군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면이 있지만, 한국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자 한국의 브레츠천왕이다. 막장선이 유명한 연산군과 존속살해범 펑샹왕도 비교가 안 된다.

연산군은 태자 시절 비교적 평범했던 데다 즉위 초에는 그런대로 괜찮은 왕이었던 분이었다. 이후의 악행에 대해서는 비극적 죽음을 맞은 어머니 때문에 삐뚤어졌거나 정신 이상을 겪었을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고 봉상왕은 단지 의심에 미치광이가 됐다는 기록이 있는데.

충혜왕은 어려서부터 이미 가망이 없었다. 전혀 대답이 없다. 그야말로 '막장 원톱'

2. 시호의 뜻

충혜왕이라는 시호는 원래 내려온 시호이다.

'충(忠)'은 원나라 간섭기에 재위한 왕들에게 '너희는 부하이니 우리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의도로 원래의 머리글자로, 후혜는 이 왕의 행차상 좋은 시호를 내릴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은혜의 글씨를 썼다고 한다.

충혜왕뿐 아니라 중국이건 시호에 '은혜'자가 들어간 군주는 몹시 무능하거나 사이코패스이거나 적어도 어느 쪽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혜공왕, 서진혜제처럼).

3) 생애

비윤리적 행세를 하는 성욕을 주체할 수 없는 인물이었지만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유욱 같은 사이코패스 살인마왕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것 말고는 좋은 점이 하나도 없는 성범죄자다.

세자 시절부터 흉년이 들어 절 지붕 위의 새를 잡는다는 이유로 절을 방화한 뒤 튕겨 나왔다.또는 불량배들과 어울려 걸핏하면 여성을 협박하거나 술을 즐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아들의 만행을 들은 부왕 충숙왕도 경악하며 이놈! 너는 왜 망나니처럼 굴었느냐고 욕까지 할 정도였지만 삐딱하게 말로만 고치겠다고 고치지 않았다.

이후 즉위식을 위해 고려로 가는 길에 마침 원나라로 가던 부왕과 황주에서 만났는데 화려한 복장으로 호례, 즉 몽고의 아들에게 "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고려 사람인데 어디서 내게 호례를 하느냐. 그리고 "옷이 뭐가 그리 사치냐"고 꾸짖는 충숙왕의 서슬에 놀라 울면서 물러났다고 한다.

아버지 충숙왕도 크게 뒤틀려 신하의 아내를 빼앗는 등으로 폐위되었다가 충혜왕은 진정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왕좌에서 잠시 쫓겨났다가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왕위에 복위된 경우이다.

충혜왕은 왕이 되자마자 여자의 색을 너무 즐겼지만, 정사에는 관심도 없었고 환관이나 스모도 즐겼으며, 심지어 그가 궁궐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초석 밑에 자식을 묻는다는 소문이 돌면서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

연산군처럼 여자는 신하의 아내든 뭐든 예쁘면 다라는 식으로 위협했다.이 비윤리적 행위가 극에 달했을 때에는 장인의 후처와 부왕의 후처(즉 장모와 계모)를 강간하였다.

5월 병인일, 그 장인 삼사좌홍융의 계실인 황씨를 간하였다.5월 경오일 왕의 서모인 권씨와 친분을 쌓았다.5월 환관 유성의 부인 인씨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왕이 구천우 강윤충을 거느리고 그 집에 가서 유성에게 술을 그 자리에서 유성이 왕에게 "전하께 곧 복위될 것이니 백성들을 잘 위로하고 아낌없이 칭찬해 주십시오."라고 왕의 속마음이 아내를 꾀는 것도 모르고 유성은 왕이 자신을 끔찍이 아낀다고 착각하여 행동을 매우 조심하자 주위 사람들이 은근히 비웃었다.

8월 갑오일에 경화공주가 왕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잔치는 끝났으나 왕은 취한 척 궁궐에 돌아가지 않고 날이 저물자 공주의 침실로 들어가 정을 통했다.

이 사람이 패탈한 충숙왕의 아내는 2명이고 다른 한 명은 수비 권씨, 다른 한 명은 당시 충숙왕의 정비 격에 있던 경화공주였는데 경화공주를 범하면 그야말로 형체가 바뀐다.

고려 사절요를 보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주를 위해 향연을 베풀었고 공주도 그 답례로 연회를 베풀었는데, 연회가 끝나자 충혜왕은 경화공주의 침실로 들어가 저항하는 경화공주를 송명리 등의 부하로 명하여 사지를 묶어 놓았다.연산군은 그래도 계모를 강간하지 않았다.

또한 경화공주가 억울하게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말을 사려 했으나 충혜왕이 마시장을 열지 않아 말을 팔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어 사신을 보내어 원나라에 뇌물을 바치고 국새 반환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충혜왕에게 겁탈당한 경화공주의 밀고로 조적 등 심왕 일파가 국새를 영안궁에 숨겨 군사 1,000여 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충혜왕은 이를 평정했다(!). 이후 경화공주를 부패로 악명이 높았던 만호임숙의 집에 유폐시킨다.

얼마 후 이 개막이 발각돼 원래 국새를 가져온 사신 두린이 경화공주를 알현했을 때였다. 두린은 황제가 내린 술을 경화공주에게 바쳤지만 경화공주는 술도 못 마신 채 수치심에 울고만 있었다.

이에 다른 부하들을 모두 물려준 뒤 경화공주는 자신이 당한 치욕을 두린에게 말하게 되고, 두린 일행은 충혜왕을 원으로 압송한다.충혜왕은 원나라로 끌려가 투옥되었다가 자신을 고발한 환관이 실각하자 다시 복위하였는데, 그의 입장이 원래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배짱이 두둑하다고나 할까. 이 외의 기록은 링크를 참고하자.#

3.2 폐위와 끝끝내 이를 보다 못한 환관 고용보와 기황후의 형이자 부원배 속에서 원탑을 달리던 기철이 원나라 황제에게 청하고 원나라가 사신을 파견해 충혜왕을 부르기까지 했다.

이 두 사람이 국사의 정상급을 달리는 유명 간신배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을 취했다는 것은 충혜왕의 장사 솜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지만 실제로 간신배라 해도 국가통치의 임무를 맡은 만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왕이 무능할 뿐 인간임을 완전히 포기해서는 안 되었다.

충혜왕은 의외로 눈치가 빠른지 아프다는 이유로 출두를 계속 거부했지만 결국 원나라 사신은 충혜왕을 속여 그를 정동성 안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처음부터 폐위시킬 생각으로 유인했으니 보자마자 사신은 왕에게 무례하게 발길질을 했고, 환관 고용보는 이를 모른 척했으며, 사신의 호위병은 압송이라는 이유로 주위에 칼까지 들이대며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날이 1343년 11월 22일(음력) 갑신일, 1343년 12월 9일(양력)이었다. 이로써 직무수행이 불가능해지고 왕권이 정지되었다. 제물을 바칠 사람이 없어 왕이 직접 짐을 챙겨 압송하였다.

결국 원나라로 강제 송환되는 도중에도 지방 수령에게 추워서 이불을 요구했지만 그 관리는 네가 잘못 건넬 수 없다는 식으로 거절당하는 등 굴욕을 당한다.물론 나중에 그 관리는 처벌을 받게 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관리를 처벌한 자가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체포하라는 명을 받고 고려에 와서 충혜왕을 직접 구타까지 했던 관이라는 몽골인이었다.

안균씨에게 와서 "왕이 폐위된 주제에 자기의 잘못도 모르고 뻔뻔스럽게 내 이불을 빼앗으려 한다"고 아뢰자, "자네에게 이곳을 다스리게 한 사람이 누구냐. 네가 섬기는 임금이 추위를 이기지 못해 이불을 찾는데 네가 주지 않는 것이 신하의 도리인가?"하고 철자로 반죽음이 되도록 때렸다.충혜왕의 입장에서는 물론 병을 주고 약을 줄 일이다.

원나라 혜종(순제)은 충혜왕에게 너의 죄가 너무 커서 너의 피를 천하의 모든 개에게 먹여도 모자라지만(이하이혈, 천천하지구, 유위부족), 짐은 살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귀양을 보낸다는 투로 말해 주눅이 들었다고 한다.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사방에 흩뿌려도 모자랄 만큼 대단한 죄인이라는 뜻이다.

보통 이런 류의 발언은 역성혁명에 실패한 사람들에 한해서만 행해지는데, 당시 몽골인들이 피 흘리는 처형방법을 극도로 금기시했던 것을 보면 충혜왕의 행동을 원나라 조정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준다.

결국 충혜왕은 티베트로 유배된 할아버지 충선왕처럼 원나라에 의해 유배된 두 번째 고려왕이 되었다.그러나 충선왕은 원나라의 정치적인 문제로 유배되었으므로 나중에라도 쓸 가치가 있어 유배되었다.

그래서인지 훈양현으로 귀양가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급서했다.

항간에는 귤을 잘못 먹다 체해 급사했다는 설도 있고 독이 든 술에 독살됐다는 설도 있었다. 갑자기 사망한 것을 보면 원나라에서 손을 쓴 것이 분명한데 고려 사절요에 따르면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고려민이 기쁨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지전차장 퇴각지국인청취지상', '미지여여여현', '혹운위이지상지곡' 등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이마치로재지국인청취지자.어떤 이는 그를 독살했다고 했고, 어떤 이는 귤을 먹다 죽었다고 했다.그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고 지체 낮은 백성들 중에는 살아났다며 펄쩍펄쩍 뛰는 자까지 있었다. 그에 앞서 민간에 "아산고지나 이제 가면 언제 오느냐?"는 찬요가 유행하였는데, 이 일이 있은 후 어떤 이가 이 노래의 전절을 "악양망고지난"으로 해석하고 "악양에서 죽는 재난을 만났으니 오늘 가면 어느 때로 돌아가느냐?"는 뜻이라고 하였다.《고려사절요》 권25 충혜왕 갑신 5년 (1344년)▶개풍전 고려 충혜왕 영릉의 1916년에 촬영된 개풍전 고려 충혜왕 영릉으로 전해지는 장소의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유해는 고려로 운구돼 영릉에 안치됐다.공교롭게도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로 돌아온 그 달, 충혜왕에게 겁탈당한 경화공주가 원통한 삶을 마감했다.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로 돌아온 날을 정확히 알 수 없어 경화공주가 원수가 죽은 모습을 보고 저승으로 갔는지 알 수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어린 두 아들이 각각 충목왕과 충정왕에 즉위하지만 둘 다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 이것이 고려 멸망의 단서가 되었다.

진정한 장군님 마지막으로 고려사에 기록된 사관의 글을 보자.유생활보호조합연합회를 통한 황폐지우전에 대한 문서수집계획이 필요하다.척) 일유직언자 필가주륙 인과외죄 이룰 수 없는 자이다.

왕은 사납고 주색을 좋아했으며, 놀이와 사냥에 탐닉하여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남의 아내나 첩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으면 친소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후궁에 들어갔으니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또 재물에 관련된 일이라면 아무리 세세한 일이라도 계산하여 항상 이익을 올리려 하므로, 군조들이 다투어 계책을 추진하여 남의 땅과 노비를 빼앗아 모두 보흥고에 소속시키고 궁중의 마구간을 준마로 채웠다. 또 회차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 이에 대한 이자를 얻어 소를 도축하고 그 고기를 매일 15근씩 바치게 했다.새 궁궐을 지을 때는 깃발을 펴고 북을 설치한 뒤 친히 담에 올라가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격려했다. 궁궐이 완공되자 도에서 옻칠을 하고 단청을 칠하는 물감을 기한보다 늦게 가져온 사람들에게는 몇 배에 해당하는 기를 추심했다.관리들은 이를 기회로 백성들을 가렴주구하였고, 백성들은 근심과 원한에 휩싸였다. 군소배들은 출세하고 충실한 사람들은 쫓겨나고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면 반드시 사형시키고 말았으니 사람들이 처형될까 두려워 감히 발설하는 자가 없었다.『고려사』 충혜왕세가총서

4. 재평가?

최근 정치 운영과 개혁 정책을 분석한 결과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출간하는 53권의 한국사 중 제19권 고려후기 정치경제편에 역대 충자 회람왕들의 항목을 보면 그 내용은 이렇다.

일반적으로 충혜왕에 대해서는 왕이 음행을 일삼았다는 사실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그러나 정치 운영과 정책 시행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왕은 상업활동 진흥과 유통구조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고 4급전 폐지 등 토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여기에 각종 세목을 신설해 권력층을 견제했다. 원의 간섭으로 폐위된 경험이 있어 낙소배를 비롯한 측근 세력을 광범위하게 형성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원 세력인 기철, 고용보와 대립하게 되었다.

즉 충혜왕의 개혁 시도는 전방위적으로 친원파를 압박하는 것이었고, 고려 정국은 충혜왕파 대 친원파로서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 충혜왕은 고양보 등에 의해 체포되어 원나라로 압송되었고, 곧바로 악양현으로 유배되어 사망하였다. 기철 등 부원 세력은 충혜왕의 왕권 강화로 위축되자 왕을 체포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 위기 국면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원으로서도 충혜왕의 개혁정치가 원나라의 고려종속정책에서 일정한 차원을 벗어난 것이라고 받아들인 결과였다.

즉 충혜왕의 폐위에는 원나라 고려에 대한 종속정책과 부원세력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었다. 따라서 원나라는 충목왕 즉위 후 충혜왕의 대정치를 전면 부정할 수밖에 없었고, 왕의 폐위에 대한 고려 정치세력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도 개혁을 표방할 수밖에 없었다.한국사 제19권 고려후기 정치경제편]

그가 이런 권력을 개인의 폭정에 사용하지 않고 보다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용했다면 고려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권문세족을 짓누르고 획득한 재정이나 권력을 백성을 위해 썼더라면 지지가 높았을 텐데 왕과 신흥세력의 악소배가 마구 써버렸으니 백성 입장에서는 왕이나 권문세족이나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가 폐위된 것도 결국 자신의 행위로 인한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매우 안타까운 부분이다.

그의 이런 성향은 증조부인 충렬왕이나 아버지 충숙왕 같은 시대의 한계에서 비롯된 문제일지도 모른다. 충렬왕이나 충숙왕의 경우도 원나라의 압박과 권문세족의 견제로 제대로 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들 왕의 경우에도 정사를 멀리하고 사냥과 여색에 빠지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충혜왕은 어려서부터 원에 있으면서 그곳의 퇴폐적 풍속에 빠졌다는 기록이 있다. 한마디로 제대로 된 제왕학이나 정치적 자제력을 그에게 교육시킬 여건도 아니었다는 얘기다. 후대 왕인 우왕도 어려서부터 권신의 압박 때문에 이런 루트에 빠졌는데, 이때 큰아버지 충혜왕과 비교되는 것은 의미심장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지나치긴 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고려사에 실린 충혜왕에 대한 사신의 논평도 이와 비슷한 논지다.충혜왕은 영리한 재주를 나쁜 일에 썼으므로 악소배들과 친하게 지내며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결국 안으로는 부왕의 질책을 받고 위로는 천자의 벌을 받아 죄수의 몸으로 귀양을 가다가 객사한 것도 당연했다.다만 늙은 신하 이조년만이 간곡히 충고를 하였으나 그 말조차 듣지 않았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5. 사냥의 왕

재위 원년 당시의 사냥 기록이다. 참고로 사냥이라고 해도 그저 활 한 방 쥐고 산에 가서 짐승을 쏘아 잡는 수준을 생각해 그 정도 취미는 뭐가 문제일까 생각해 봐도 곤란하다.

평민이나 지배계층이라도 보통 집사람이라면 그렇겠지만 국왕이 사냥을 나갈 때 경호를 담당하는 많은 호위병, 국왕과 신하와 병사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각종 요리사, 식재료와 사냥도구, 기타 비품을 운반하는 짐꾼, 사냥터에 허가받지 않은 사람들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경비병, 사냥감을 찾거나 쫓아내야 하는 감시원 등 적어도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했다. 그 많은 사람이 움직이며 숙식을 하려면 당연히 월급과 물품 등의 경비가 만만치 않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사냥풍속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사냥은 사실상 당시의 워크숍으로 보면 된다. 즉, 왕이 사냥을 자주 갔다는 것은 그만큼 낭비가 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나마 이 중간에서 임금 노릇을 한 것은 4월 경인일로 끌려간 고려 국민을 돌려달라는 글을 써 보내기도 했다. 그나마 돌아와 사냥을 다닌 기록보다 궁내에 강간 살인 등의 기록이 많아졌다. 이거는 뭐...

6. 가계도

1비 덕녕공주(德寧公主, ?~1375년) 1남 충목왕 왕흔(忠穆王 王 (, 1337~1348년) (재위 1344년~1348년)

1녀 장녕공주(?) : 원나라 황족에게 시집갔으나 원나라 수도 대도가 명나라에 점령되는 혼란 속에서 행방불명되었다. 그러자 숙부인 공민왕은 신하들에게 장녕공주를 불러들였다. 이후 명나라 태조 홍무제(주원장)가 장녕공주를 찾아 고려로 보냈고, 공민왕은 장녕공주를 어머니인 덕녕공주와 거처하게 했다. 이후의 일은 기록이 없어 덕령공주와의 사이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비 희비 윤씨(?~1380년) 2남 충정왕 왕저(1337년~1352년) (재위 1349년~1352년)

은천옹주 임씨(?) : 충혜왕과 비슷한 성품으로 충혜왕의 비빈을 잘 맞아 총애를 받았다(마치 연산군과 장녹수의 관계처럼). 사치가 심했다고 한다. 원래 상인의 딸로 태어나 충혜왕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를 파는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기옹주라고 비꼬았다. 충혜왕이 폐위되어 원나라로 끌려간 뒤 은천옹주도 궁궐에서 쫓겨났다.

셋째 아들 석기(?~1375년) : 부모가 몰락하고 이복 충정왕이 즉위한 뒤 승려가 되라는 명을 받고 여러 절을 전전하였다. 나중에 숙부 공민왕이 즉위하자 모반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되는 과정에서 공민왕의 명령으로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놀랍게도 살아남아 결혼까지 하고 아들 하나 낳고 숨어 살았다. 그러나 조카인 우왕이 즉위한 후 석기와 그 아들의 존재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었다.

화비 홍씨(생물연도 미상): 경상도 진변사 홍탁의 딸이다. 충혜왕은 그녀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정식으로 궁궐에 불러들이지도 않고 후궁으로 삼았다. 위의 은천옹주는 원래 일개 궁인의 신분으로 충혜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홍씨가 화비에 책봉된 것을 질투하였다. 그리고 충혜왕이 은천옹주로 책봉하였다. 그런데 충혜왕은 곧 화비 홍씨에게 흥미를 잃어 궁궐 밖에 방치한 채 자주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고려의 제28대 국왕. 충혜왕 | 작성자 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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